고객 예금 빼돌려 누리는 사치, 화려할수록 무너짐은 비참했다

입력 2020-12-11 17:17   수정 2020-12-12 08:28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정성스럽게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남편(다나베 세이치 분)은 직장에서 못 마친 업무에 정신이 팔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리카는 포장된 선물도 조용히 내놓는다. 남편은 “이게 뭐야?”라며 포장지를 뜯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어색한 미소에도 고마운 리카는 “일할 때 시계 필요할 거 같아서”라고 말한다. 적은 월급에도 차곡차곡 돈을 모아 준비한 선물이다. 하지만 이내 남편은 “운동할 때 하면 되겠네”라고 무심히 답한다. 리카는 “비싼 거 아니어서 미안해”라며 돌아서 고개를 떨군다.
버블 붕괴로 맞이한 ‘잃어버린 20년’
영화 ‘종이달’의 배경은 1990년대 중반 일본이다. 리카는 정기예금 상품을 방문판매하는 계약직 은행원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리카는 우량 고객 고조(이시바시 렌지 분)의 집을 찾았다. 고조는 집 금고에 현금을 쌓아두고 사는 노인이다.

리카의 방문에 고조는 ‘갑’의 지위를 한껏 즐긴다. 리카는 차를 타오고, 고조는 리카에게 성희롱 섞인 농담을 던진다. 고조는 부엌에 있던 리카의 어깨를 만지려고까지 한다. 그 순간 젊은 남자가 불쑥 집에 들어온다. 고조의 손자 고타(이케마쓰 소스케 분)다. “괜찮나요?”라며 놀란 리카를 달랜다. 고조는 호통친다. “누구 멋대로 들어와!”

고조는 고타에게 “버러지같이 내 돈만 노리는 놈”이라고 또 한번 소리친다. 대학생인 고타는 등록금을 빌리고자 매번 고조의 집을 찾았다. 고타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아르바이트도 찾기 쉽지 않아 등록금을 댈 방법이 없었다. 고조는 부자임에도 고타를 도와주지 않는다. 고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조의 집에 매번 방문하지만 둘 사이는 계속 틀어지고 만다.

당시 일본 사회에선 고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1990년 일본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급속하게 하락하는 버블 붕괴 국면을 맞이한다. 이후 일본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지고,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젊은 층들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보통 국가 경제는 자산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진 이후 불황에 빠진다. 이는 ‘역(逆) 부의 효과’ 때문이다. 자산 가격이 급속도로 하락하면 경제 주체들은 소비를 줄이게 된다. 자산을 취득하려고 끌어온 부채를 갚기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어서다.

자산 가격 하락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자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금융회사는 부채 상환을 요구하고 채무자들은 너도나도 자산을 매각하게 된다. 하락이 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1990년 시작한 일본의 자산 가격 하락은 2005년까지 지속됐다. 2002년엔 1990년 대비 자산 가치 하락 규모가 1500조엔(약 1경5645조7500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으로도 불린다.
가짜 위에 쌓는 쾌락
리카는 고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리카는 고타를 연민하게 된다. 리카 또한 일본 경제에 그늘이 드리운 상황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겨우 계약직을 따낸 여성이다.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자신의 삶을 억누르며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 날 리카는 지하철역에서 고타를 우연히 만난다. 둘은 홀린 듯 강한 끌림을 느끼고 서로를 탐하게 된다. 리카는 죄책감보다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에 도취된다. 남편에게서 볼 수 없던 고타의 다정함에 날이 갈수록 빠져든다.

그러다 리카는 끝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다. 고타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조의 예금에서 돈을 몰래 빼오며 횡령을 저지른다. 처음에는 “고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어려운 법. 즐거워하는 고타의 모습에 리카는 점점 더 대담해져 간다. 고조의 돈뿐만 아니라, 다른 고객들의 예금에도 손을 댄다. 빼돌린 돈으로 그들은 초호화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명품 가방과 옷을 거침없이 사며 행복해한다. 가짜로 이뤄진 허영 속에서 당장의 순간만을 살며 쾌락을 느낀다.

영화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가짜로 쌓아 올린 부의 모습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1980년대 일본 버블 경제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진다. 일본 정부는 1980년대 중반 급격하게 환율을 내린다. 1985년 ‘플라자 합의’의 결과물이다. 이 합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엔화가 고평가되면 일본의 수출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다. 반대로 미국 수출기업들은 일본에 진출하기 수월해진다. 이에 일본 정부는 수출 감소를 내수경제 활성화로 극복하려 했고, 금리를 인하하게 된다.

금리가 인하되면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은 활발해진다. 대출이 수월해지면서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산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한다. 일본 전체 주식시장의 주가수익비율(PER)을 보면 알 수 있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수치다. PER이 높다는 것은 기업의 영업활동에 비해 주가가 높게 형성됐다는 의미다. 일본 주식시장의 1985년 PER은 33배였는데, 플라자 합의에 따른 금리 인하 단행 이후 급격히 상승해 1989년에는 67배에 달하게 된다.

부동산 가격도 폭등했다. 1984년을 전후해 100포인트에 불과하던 일본 전국 지가는 1990년 160포인트까지 올라간다. 도쿄와 오사카 등 이른바 6대 대도시의 지가는 300포인트까지 급등했다.

리카가 남의 돈으로 허영심 많은 생활을 즐긴 것과 같이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는 생산을 통한 부가 아니라 빚으로 쌓은 허영 속에 환락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앞서 살펴봤듯 자산 가격 폭락에 의한 장기 불황이었다. 과도한 자산 가격 상승에 1989년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고, 부동산 시장 과열에 일본 건설사들이 주택 공급을 과도하게 한 것이 기폭제가 돼 버블이 터졌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졌듯, 리카의 일탈도 결국 덜미를 잡히게 된다. 은행 직장 동료 유리코(고바야시 사토미 분)가 은행 기록을 정리하던 중 수상한 점을 발견하면서다. 은행 본사에서 사람들이 파견되고 리카는 붙잡히게 된다. 징계를 기다리던 중 리카는 유리코에게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가짜였기 때문에 언젠가 끝나겠지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행복했어요. 가짜니까 망가져도, 그리고 망가뜨려도 상관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난 자유롭구나 생각했어요.”

우리는 삶을 절제하고 단련한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발걸음들이다. 무절제는 순간의 쾌락을 선물하지만 영원할 수 없다. 아쉽게도 리카의 자유가 짧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현실에 발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나를 찾아온다. 가짜로 쌓아올린 버블은 개인의 삶을 망가뜨렸다. 가짜가 아니고선 행복을 쌓아올리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쓰라린 기억이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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